대리님도 저번 주에 지각하셨잖아요. 왜 대리님이 하실 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제가 할 때는 기강 해이인가요?

“대리님,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신입 사원 지훈이 결재판을 탁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지금 영수증 날짜 하루 틀렸다고 저를 부서 규칙 다 말아먹는 사람 취급하시잖아요. 그런데 대리님도 저번 주에 지각하시고 결재선 무시하셨잖아요! 왜 대리님이 하실 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제가 할 때는 기강 해이인가요?”
회의실에 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연(6번)에게 쏠렸다. 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내 상황이랑 그쪽 상황이 같아요? 나는 팀장님 지시로 밤새워서 자료 만들다가 늦은 거고, 결재선 건너뛴 것도 다 우리 팀 살리려고 예외적으로 한 거잖아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서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훈을 조직의 룰을 깨는 불량한 직원으로 몰아붙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회의실에서 자신이 파렴치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모든 비난이 나에게 쏟아질 것만 같아.
도망치듯 화장실 칸으로 들어와 변기 뚜껑을 닫고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훈의 그 원망 섞인 눈빛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억울했다. 내가 어떻게 이 팀을 지켜왔는데, 내가 얼마나 발버둥 치며 그 무서운 책임들을 다 짊어지고 왔는데.
숨을 헐떡이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굳게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 어릴 적 낡은 거실의 풍경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네가 거실 한가운데서 알짱거리니까 아빠가 화를 내고 나간 거 아니야! 넌 대체 누굴 닮아서 매번 집안을 이 꼴로 만들어!”
엄마는 화가 나면 온 집안의 물건을 바닥으로 쳐내며 소리를 질렀다. 정작 물 컵을 깬 것도, 신경질을 부린 것도 엄마 자신이었으면서, 그 모든 혼란과 두려움의 책임을 방구석에 웅크려 떨고 있던 여덟 살의 나에게 쏟아부었다.
그때 나는 뼛속 깊이 깨달았다. 내가 아주 작은 빌미라도 제공하면, 이 세상의 모든 비난과 끔찍한 분노가 나를 향해 화살처럼 날아올 것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완벽한 규칙을 외우기 시작했다. 매뉴얼대로만 움직이면 안전할 테니까. 혹시라도 내가 선을 넘는 일이 생기면, 그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속여야만 했다. 내가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다시 그 방구석의 힘없는 아이가 되어 온갖 비난을 뒤집어써야 할 것 같아 너무 두렵다.
서연 씨를 응원합니다!
당신은 든든한 사람이네요.
누구보다 조직을 아끼고, 작은 위험조차 미리 대비하며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온 서연 씨의 책임감 넘치는 시간들을 저는 온전히 존중합니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빈틈을 메우기 위해 언제나 마음의 레이더를 켜두고 긴장한 채 살아오느라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우셨나요. 당신이 들이대는 그 깐깐한 잣대는 사실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불안에 떠는 어린 서연 씨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눈물겨운 방패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연 씨, 당신을 옥죄는 이 질문을 조용히 마주해 보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스스로의 작은 실수를 쿨하게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정말 세상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당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낼까요?
지금의 당신은 부모님의 거대한 분노를 억울하게 받아내야만 했던 그 무기력한 아이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유능하고 단단한 어른입니다. 타인의 실수에 조금 관대해지고 나의 결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서, 당신이 서 있는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바로 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 ‘5초 멈춤 실험’을 제안합니다. 누군가 당신의 사소한 실수를 짚어내거나 후배가 작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즉각적으로 나를 방어하거나 상대를 지적하려는 입을 딱 5초만 다물어 보세요. 그리고 긴 변명 대신 “아, 제가 그 부분은 놓쳤네요. 고마워요.” 혹은 “그럴 수 있죠, 다음엔 조심합시다.”라고 짧고 담백하게 넘겨보는 겁니다.
원인 모를 불안감이 밀려와 다시 누군가를 탓하거나 나를 변호하고 싶어지는 밤이 오면,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소리 내어 말해주세요.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안전하다. 나의 실수를 인정해도 내 존재 가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당신은 뾰족한 가시를 세우고 방어하지 않아도 이미 곁에 두고 싶은 좋은 사람입니다. 이제 그만 잠들어도 돼요.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