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성취형과(3번) 평화중재형(9번)의 멈춰버린 거실 시계

주말 오후, 거실의 공기는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다. 3년 동안 밤낮없이 매달렸던 임원 승진 심사에서 최종 누락된 후, 지훈(3번)은 벌써 보름째 거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있다. 매일 아침 칼같이 다려진 셔츠를 입고 현관문을 나서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에 며칠째 감지 않은 머리, 초점 없는 눈으로 의미 없이 텔레비전 채널만 돌리는 그의 주변에는 마시다 만 맥주 캔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숨 막히는 정적의 반대편, 식탁 의자 끝에 수진(9번)이 소리 없이 앉아 있다. 그녀는 남편의 상태가 몹시 신경 쓰이지만, 발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숨죽여 마른빨래를 개고 있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남편의 어두운 기운 앞에서 수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은 그저 없는 사람처럼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끝없는 침묵을 견디다 못한 수진이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입을 열었다.
저녁은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 데워서 간단히 먹을까.
그 순간, 죽은 듯 누워있던 지훈이 스프링이 튕겨나가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핏발 선 눈으로 수진을 노려보던 그는 억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내가 지금 찌개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게 생겼어? 내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깟 저녁 메뉴나 고르면서 그렇게 태평할 수가 있냐고. 당신한테 나는 도대체 뭐야? 돈 벌어오는 기계였어?
단지 이 불편한 공기를 환기하고 싶었던 수진은 예상치 못한 날 선 비수에 맞은 듯 얼어붙었다. 억울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던 수진은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개고 있던 수건을 바구니에 거칠게 던져넣고는 도망치듯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하고 굳게 닫힌 방문 소리가 집안을 크게 울렸고, 텅 빈 거실에 홀로 남겨진 지훈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훈의 마음: 나를 찌른 건 실패가 아니라, 당신의 그 평온한 일상이었어
눈을 뜨는 매 순간이 형벌을 받는 것만 같아. 내 가치는 오직 내가 이뤄낸 눈부신 성과와 사람들의 인정으로만 증명되는 거였어. 그런데 그 모든 걸 잃어버리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조차 없는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가 된 기분이야.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 머릿속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나 자신을 향해 쌍욕을 퍼붓고 찌르며 가혹하게 자학하고 있어.
이렇게 철저하게 밑바닥을 치는 초라한 내 모습을 세상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내 아내인 당신만은 달랐으면 했어. 내가 이렇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면, 적어도 당신의 세상도 나와 함께 무너져 내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고요할 수가 있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빨래를 개고, 평소처럼 찌개 메뉴를 묻는 당신의 그 잔잔한 일상이 나에게는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어. 내가 무능해지니까 이제 내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싶어서 걷잡을 수 없는 비참함이 밀려왔어. 사실 당신이 미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미칠 듯이 혐오스러운데, 그 뜨거운 불덩이를 가장 만만한 당신에게 던져버렸어.
수진의 마음: 당신이 부서질까 봐 숨죽여 기다린 게 내 최선의 사랑이었어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야 할 것만 같은 숨 막히는 시간들이야. 당신이 그 자리를 위해 얼마나 인생을 갈아 넣었는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무너져버린 당신을 보는 내 마음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어. 속으로는 나도 덜덜 떨며 울고 있었어. 하지만 평소에 우리 집안의 모든 기둥 역할을 하던 당신이 쓰러지고 나니,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어.
어설프게 다가가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 당신의 그 뾰족한 자존심을 긁게 될까 봐 무서웠어. 당신 심기를 건드려서 이 집안의 남은 평화마저 산산조각이 날까 봐 너무 두려웠어.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이 스스로 동굴에서 걸어 나올 때까지 묵묵히 일상을 유지하며 기다려주는 것뿐이었어. 어지러운 집을 치우고, 제시간에 밥을 챙기는 게 내가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지지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갑자기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아세우며 소리를 지르다니.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 당신의 그 거대한 분노를 감당하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아서, 그저 아무도 없는 방으로 도망쳐 숨어버리고 싶었어.
맘풀고 처방전: 지훈과 수진의 관계를 응원하며…
두 사람의 거실에는 지금, 길을 잃고 상처 입은 맹수와 지레 겁을 먹고 웅크린 아이가 함께 있는 것만 같습니다.
먼저 지훈 씨, 당신은 열정적인 사람이네요~ 목표성취형인 당신은 언제나 앞만 보고 달리는 열정적이고 목표를 향한 집요함으로 살아왔습니다. 실패는 용납 못 하는 성향이기에, 이번 좌절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깊은 상실일 것입니다. 지훈 씨가 아내에게 모진 말을 쏟아낸 이유는 그녀가 미워서가 아니라, 성취하지 못하는 자신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지훈 씨, 당신은 달리지 않아도, 무언가를 쟁취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고장 난 엔진을 탓할 때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무너진 자신을 인정하고, 죄책감 없이 온전한 휴식을 스스로에게 허락해 주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수진 씨, 당신은 편안한 사람이네요~ 평화중재형인 당신은 늘 주변을 편안하게 품어주고 조화로우며 갈등은 피하고픈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편의 날 선 감정이 두려워 침묵과 일상 유지라는 안전한 방패 뒤로 숨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훈 씨처럼 극도의 스트레스에 빠진 사람에게 무작정 주어지는 침묵과 기다림은 때로 철저한 외면이나 방치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지금 수진 씨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해결책이나 번지르르한 위로가 아닙니다. 남편이 거친 말을 쏟아낼 때 방문을 닫고 도망치는 대신, 그 자리에 머물러 주세요. 그리고 조용히 곁에 앉아 손을 꽉 쥐어주며 이렇게 말해주세요. 당신이 회사에서 잘리든 백수가 되든, 내 남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난 절대 당신 안 떠나.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 자체가 가장 간절하게 필요했던 겁니다. 목표를 잃어버린 남편의 텅 빈 마음에 아내의 묵직한 온기가 닿기를, 그래서 두 사람의 멈춰버린 거실 시계가 다시 따뜻하게 흘러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