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한테 나는 뭐야? 사랑하는 사람이야, 아니면 분석해야 할 데이터야?”

현관문 앞에는 절반쯤 닫힌 캐리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아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턱 끝에 맺혀 떨어지는 궤적을 바라보며, 도진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호흡수와 목소리의 떨림 간격을 계산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해? 왜 항상 나 혼자 벽을 보고 소리치는 것 같지? 오빠는 슬프지도 않아? 내가 떠난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남 일 보듯 서 있을 수가 있어!”
지아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아지자, 도진(5번)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디지털 포렌식 수사관인 도진은 타인이 필사적으로 지워버린 수만 건의 메시지와 은밀한 검색 기록은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이다. 남이 숨긴 진실을 읽어내는 데는 도가 텄으면서, 정작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연인의 마음 앞에서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쏟아지는 감정이 버거웠다. 저 격렬한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면 도진은 안에 남은 알량한 에너지가 모조리 방전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 지아를 안고 가지 말라고 붙잡아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몸은 이미 가장 안전한 도피처를 찾고 있었다.
“지금 넌 감정적으로 너무 격앙되어 있어. 비논리적인 상태에서 대화하는 건 무의미해. 진정되면, 그때 다시 데이터… 아니, 사실을 바탕으로 얘기하자.”
도진 입에서 나온 건 변명조차 되지 못하는 건조한 문장뿐이었다. 지아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캐리어 지퍼를 거칠게 닫았다. 쾅,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빈 집안을 무겁게 울렸다. 도진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익숙한 어둠이 깔린 내 서재로 도망치듯 걸어 들어갔다.
수만 개의 타인 기록을 복구하면서, 왜 내 마음속은 텅 빈 백지 같을까?”
컴퓨터 모니터의 푸른 불빛만이 서재를 밝히고 있었다. 지아가 떠났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올 뿐이었다. 인간관계는 왜 이렇게 에너지가 많이 드는 걸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다는 건, 결국 내 안의 배터리를 타인에게 속절없이 빼앗기는 일표준이 아닐까.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자, 잊고 지냈던 서늘한 기억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도진아, 엄마는 너밖에 없어. 아빠가 또 저러는데 엄마는 진짜 죽어버리고 싶어. 넌 엄마 맘 알지? 넌 엄마 버리면 안 돼.”
술에 취해 가구를 때려 부수는 아빠의 고함 소리 너머로, 엄마는 열 살짜리 내 좁은 어깨를 뼈가 으스러져라 끌어안고 오열했다. 엄마의 그 뜨겁고 축축한 눈물은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숨통을 조이는 족쇄였다. 어린 나는 부모의 거대하고 통제 불능인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때 알았다. 누군가의 감정에 깊이 엮인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송두리째 짓눌리고 메말라버리는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살아남기 위해 나는 스스로 감정의 스위치를 껐다. 세상과 내 마음 사이에 두꺼운 유리벽을 세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사람들을 관찰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숨어버리면 적어도 상처받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완벽한 관찰자가 되었지만, 정작 나 자신의 슬픔이나 외로움을 느끼는 방법은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도진 씨를 응원합니다!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이네요.
혼돈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 감당할 수 없는 폭풍 속에서 어린 도진 씨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생존 방식은 거리를 두고 세상을 지식으로 통제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켜내며 훌륭한 전문가로 성장한 당신의 깊은 통찰력과 지성에 깊은 존경을 보냅니다.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조용하고 치열하게 자신을 지켜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진 씨, 이제는 안전한 서재에서 나와 이 질문을 마주해 보았으면 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발을 담근다고 해서, 정말로 당신의 에너지가 영원히 고갈되어 쓰러지고 말까요? 지금의 당신은 부모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받아내야만 했던 무기력한 열 살 꼬마가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 일상에서 해볼 수 있는 작은 연습, ‘생각 스위치 끄고 몸의 감각 켜기 실험’을 제안합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피곤함이 몰려오고 뒷걸음질 치고 싶어질 때, 그 상황을 머리로 분석하려는 생각을 딱 3분만 멈춰보세요. 대신 지금 내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내 어깨가 얼마나 굳어 있는지, 호흡은 어떤지 오직 ‘몸의 감각’에만 집중해 보는 겁니다. 감정은 분석해야 할 에러 데이터가 아니라, 그저 내 몸을 스쳐 지나가는 자연스러운 날씨 같은 것임을 경험하게 될 거예요.
지독한 고립감이 당신을 차가운 모니터 앞으로 끌어당길 때,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나는 이제 누군가와 마음을 나눠도 안전하다. 내 에너지는 타인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다시 채워질 수 있다.”
당신은 머리로 세상을 이해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온전한 사람입니다.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당신이 무너지지는 않아요. 이제 그 삼엄한 마음의 경계를 조금 풀고 편안히 잠들어도 돼요.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