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이 없으니까 진짜 불편하네
“교수님 오시기 전에 출석 확인 누가 해요?”
대학원 강의실에서 누군가 물었다. 미정(2번)이 없는 날이었다.
“미정이가 늘 하던 건데…”
“아, 맞다. 미정이 오늘 늦는다고 했지?”
열다섯 명 남짓한 소규모 강의였다. 미정이는 늘 제일 먼저 와서 칠판을 닦고, 교수님 물컵을 준비하고, 누가 결석하면 단톡방에서 상황을 물어 교수님께 전달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맡았다.
그날 미정이는 아이 병원 때문에 늦을 수밖에 없었다. 단톡방에 미리 공지했다.
“저 오늘 2시쯤 도착할 것 같아요. 혹시 결석자 있으면 교수님께 전달 좀 부탁드려요. 민수 씨가 어제 몸이 안 좋다고 했는데 확인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 명이 읽음 표시를 남겼다. ‘알겠어요’, ‘조심히 오세요’ 같은 답장도 몇 개 달렸다.
하지만 미정이가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교수님은 민수의 결석을 모르고 있었다.
“민수 학생 무단결석인가요?”
미정이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아, 교수님, 민수 씨 어제 몸이 안 좋다고 연락 왔었어요.”
“그래요? 아무도 말 안 해줬는데.” 교수님은 무심하게 출석부에 표시했다.
미정이는 주변을 둘러봤다. 단톡방에서 읽음 표시를 남긴 동기들이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 누구도 미안하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미정이는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아, 내가 부탁한 거… 잊으신 거예요?”
“아, 미안. 깜빡했어.” 한 동기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바빴거든. 미안해.” 다른 동기도 무심하게 답했다.
미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속에서 뭔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서운할까?
집에 돌아온 나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별일도 아닌데.’
하지만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도 눈물이 났다. 억울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줬는데. 결석 확인, 과제 공유, 스터디 자료 정리.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알아서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한 번, 내가 부탁했을 때,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그냥 깜빡한 거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애초에 내 부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나는 늘 그들을 챙겼지만, 그들에게 나는 그냥 ‘알아서 해주는 사람’일 뿐이었다.
문득 어릴 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엄마는 늘 바빴다. 동생 둘을 돌보고, 가게 일까지 하셨다.
“미정아, 동생들 밥 먹였어?”
“응, 엄마.”
“설거지도 했고?”
“응.”
“역시 우리 미정이는 착하네. 엄마가 미정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 말이 좋았다. 엄마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게, 내가 쓸모 있다는 게 기뻤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아팠을 때였다. 열이 나서 학교를 못 갔다.
“엄마, 나 머리 아파…”
“그래? 잠깐만. 엄마 지금 동생 우유 데워야 해.”
엄마는 부엌으로 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저녁이 되어서야 엄마가 방에 들어왔다.
“미정아, 괜찮아?”
“응… 괜찮아.”
“다행이다. 근데 미안한데, 오늘 설거지 좀 해줄 수 있어? 엄마 너무 피곤해서…”
나는 일어나서 설거지를 했다. 열이 나도, 머리가 지끈거려도.
그때 깨달았다. 내가 아플 땐 아무도 날 챙기지 않는다는 걸. 내가 쓸모 있을 때만 사랑받는다는 걸.
그 후로 나는 아프다는 말을 잘 하지 않게 됐다. 힘들어도 웃었다. 먼저 베풀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거라고, 필요로 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도 똑같았다. 나는 베풀었지만, 정작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땐 아무도 없었다.
미정씨를 응원합니다
미정씨, 당신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네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챙기고, 배려하고, 손 내미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서 세상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거예요.
하지만 잠깐, 질문 하나 할게요.
당신이 그렇게 애쓰며 베풀었던 건, 정말 그 사람들이 좋아서였나요? 아니면 베풀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나요?
그날, 동기들이 당신의 부탁을 잊었을 때 느낀 그 배신감. 그건 단순히 부탁 하나를 안 들어줘서가 아니었죠. ‘나는 이렇게 많이 해줬는데, 나는 이만큼의 가치도 없는 걸까’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어요.
미정 씨,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요. 베풀지 않아도, 챙기지 않아도, 쓸모 있지 않아도요.
오늘부터 딱 하나만 시도해볼까요?
“나도 부탁해도 돼” 실험
다음번에 힘들 때, 아무에게나 도움을 요청해보세요. 미리 백 가지를 해주지 말고, 그냥 부탁만 해보는 거예요.
“오늘 내가 좀 힘든데, 이거 대신 해줄 수 있어?”
거절당할까 봐 무서울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거절당한다고 해서 당신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나는 베풀지 않아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내가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아. 나도 돌봄받을 권리가 있어.”
처음엔 어색할 거예요. 하지만 매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당신도 당신 자신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미정 씨, 오늘 하루도 참 많이 애썼어요. 이제 그만 쉬어도 돼요. 당신은 충분히 따뜻한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