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 씨, 지금 당장 거래처에 기획안 보내야 하는데 여기서 탕비실 컵을 왜 닦고 있어요?

선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수진(9번)은 고무장갑을 낀 채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 선배님 죄송해요. 김 대리님이 복사기 종이가 걸렸다고 하셔서 그거 먼저 돕다가, 탕비실 컵이 너무 지저분하길래 얼른 이것만 씻고 바로 하려던 참이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수진은 세상에서 가장 미안하고 주눅 든 표정을 지으며 눈끝을 떨어뜨렸다. 선배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걸 왜 수진 씨가 해요? 오늘 오후 세 시까지 기획안 마감인 거 본인이 제일 잘 알면서! 됐어요, 파일 이리 줘요. 지금 수진 씨 기다리다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으니까 그냥 내가 할게요.”
선배는 거칠게 마우스를 빼앗아 들고 제자리로 쿵쾅거리며 돌아갔다. 수진은 여전히 불쌍하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변 동료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수진을 쳐다보았지만, 수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아주 작고 기이한 안도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다행이다. 내가 저 중요한 기획안을 망쳐서 욕먹을 일은 이제 없겠어. 겉으로는 착하고 미안한 척을 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하고 책임이 무거운 일은 교묘하게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적어도 혼날 일은 없으니까.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애써 달래며 나는 모니터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탕비실에서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선배의 분노 어린 타이핑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심장이 덜컥거리지만, 동시에 나를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가 등에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숨통이 트였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속을 뒤집어 놓는지. 내 일인데도 은근슬쩍 불쌍한 척을 해서 남이 하게 만들고, 급한 상황에서도 딴청을 피우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내 모습이 얼마나 얄미운지 말이다.
하지만 그 중요한 기획안 파일을 열었을 때,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얼어붙어 버렸다. 내가 쓴 기획안이 형편없다고 평가받으면 어떡하지? 내 실수 하나 때문에 사무실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어떡하지? 그 무거운 책임감과 날 선 비난에 대한 공포가 내 목을 조르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당장 내가 혼나지 않을 자잘하고 ‘착한’ 일거리들을 찾아 도망친다. 나 자신에게조차 나는 놀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일을 돕느라 바빴다고 거짓 위로를 건네면서.
여덟 살 무렵의 어느 저녁, 우리 집 거실은 늘 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 같았다. 신경질적이고 완벽주의자였던 엄마는 내가 조금만 실수를 하거나 내 의견을 내세우면 불같이 화를 냈다.
“너는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니? 비켜! 답답해서 속이 터지겠네.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그냥 구석에 가만히 있어!”
엄마는 내가 서툴게 개어놓은 빨래를 거칠게 빼앗아 털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 나는 뼛속 깊이 깨달았다. 내가 뭔가를 책임지고 잘해보려고 나설수록 갈등이 커진다는 것을. 차라리 아무것도 못 하는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웃고 있으면 적어도 날아오는 매와 폭언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답답해진 누군가가 화를 내면서도 알아서 내 문제를 다 해결해 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스스로 삶의 책임을 지는 대신, 불쌍하고 착한 얼굴 뒤에 숨어 입을 꾹 다문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미소 짓는 바위가 되었다.
수진씨를 응원합니다!
수진 씨, 당신은 편안한 사람이네요~ 언제나 갈등을 피하고 모두가 웃을 수 있는 평화를 유지하려 애쓰는 당신의 그 둥글둥글한 미소 뒤에, 사실은 책임을 지고 비난받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어린아이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기획안을 미루고 악의적으로 딴청을 피운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저 어린 시절, 실수하면 쏟아지던 그 무서운 비난과 소리침을 피하기 위해 작은 아이가 터득했던 가장 절박하고 슬픈 생존 방식이었을 뿐이죠. 남들이 보기엔 얄밉고 속 터지는 행동일지 몰라도, 당신의 내면은 그 순간 갈등의 공포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 하고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상태였을 겁니다.
하지만 수진 씨, 아주 조심스럽고도 단호하게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짐을 떠넘겨서 얻어낸 그 얄팍한 평화가, 정말로 당신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나요? 겉으로는 당신을 착한 사람으로 봐줄지 몰라도, 속으로는 당신을 향한 신뢰가 천천히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깊은 곳에서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겁니다. 갈등을 피하려다 오히려 당신 자신의 진짜 인생마저 통째로 남의 손에 넘겨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당신을 위해 일상에서 바로 시도해 볼 수 있는 작은 미움받기 실험을 제안합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중요한 업무나 책임을 맡겼을 때, 무서워서 다른 자잘한 일로 휙 도망치고 싶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을 가만히 알아차려 보세요. 그리고 눈을 딱 감고, “이 부분은 제가 끝까지 책임지고 해 보겠습니다”라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겁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상사에게 조금 혼이 난다고 해도 세상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혼자 남은 늦은 밤, 갈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질 때면 스스로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이렇게 말해주세요.
실수해도 괜찮아. 비난받는다고 해서 내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내 삶의 책임과 무게를 온전히 내가 감당할 때, 나는 비로소 가장 안전하고 단단한 어른이 될 수 있어.
그동안 싸움과 비난을 피하느라 다른 사람의 그림자 뒤에 숨어 사느라 참 많이 억울하고 외로웠지요. 부드러운 미소로 거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차가운 바위처럼 버텨온 당신의 그 애쓰는 마음을 모두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남의 손이 아닌, 당신의 두 손으로 당신의 삶을 쥐고 당당하게 걸어가도 괜찮은 시간입니다. 오늘 밤은 억지로 착한 척하느라 굳어버린 어깨를 부드럽게 풀고, 편안한 당신의 진짜 모습으로 잠들어도 돼요. 수고했어요.